그는 한때 돈을 보내라고 지시하는 사람이었다.
홋카이도에 있는 자신의 회사로 연락하면 돈이 움직였다. 파친코 영업장에서 벌어들인 돈이었고, 젊은 날 남보다 기계 한 대라도 더 팔려고 이를 악물며 쌓은 재산이었다.
한국 카지노에서 돈이 떨어지면 일본에 연락했다. 다시 돈이 왔고, 그는 다시 테이블에 앉았다.
말년에 이르러 돈의 방향은 같았지만 처지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에게 생활비를 보내는 사람은 일본에 있는 친척이었다. 더는 회사에 송금을 지시할 수 없었다. 자신의 영업장도, 삿포로의 대저택도 남아 있지 않았다. 생활이 어렵다고 사정을 설명하고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렇게 도착한 돈 가운데 일부는 먹고사는 데 썼다. 나머지는 강원랜드로 가져갔다.
최근 수년 동안 만난 장재국씨(가명.90)의 이야기는 이 두 종류의 송금 사이에 놓여 있었다.
일본에서 태어나 재일한국인으로 살아온 그는 파친코 사업으로 막대한 재산을 일궜다고 했다. 그가 말한 전성기의 재산은 약 5000억원대였다. 그러나 최근 만난 노년의 그는 강원랜드 인근에서 친척의 지원으로 생활하는 처지였다.
그의 회고에는 자신감과 후회가 번갈아 나타났다. 사업 이야기를 할 때면 남에게 지기 싫어했던 젊은 시절이 살아났고, 카지노 이야기에 이르면 끝내 되찾지 못한 돈과 떠나간 사람들 앞에서 말이 무거워졌다.
그는 자신의 몰락을 설명할 수 있었다.
어디에서 첫 게임을 했는지, 얼마를 땄다가 잃었는지, 어느 순간 멈췄어야 했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설명할 수 있다는 것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장씨가 파친코 업계에 발을 들인 것은 1962년이었다.
도쿄에서 관련 사업을 하던 삼촌의 회사에 영업사원으로 들어갔다. 그가 맡은 곳은 홋카이도였다. 일본의 북쪽 끝, 도쿄와는 기후도 생활환경도 다른 지역이었다.
그에게 주어진 것은 자신의 가게가 아니라 남의 기계를 팔아야 하는 영업구역이었다.
“선배들이 나보다 파친코 기계를 한 대라도 많이 팔면 은근히 화가 치밀었어. 주간, 월간 목표를 세워놓고 어떻게든 채우려고 했지.”
그는 자신의 성격을 설명할 때 싸움 이야기를 꺼냈다. 상대의 덩치가 커도 물러서지 않았다고 했다. 이길 때까지 버티는 기질이 장사에서도 그대로 나왔다.
재일한국인으로 살아오며 겪었다는 차별과 설움도 그에게는 뒤처질 수 없다는 다짐으로 남아 있었다.
홋카이도에서 영업을 시작한 지 2년여 만에 회사에서 손꼽히는 실적을 올렸다. 남보다 더 팔았다는 결과는 다음 목표를 만들었다. 언제까지 삼촌 회사의 영업사원으로만 살 수는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