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타타 저널

요지경카지노·26. 10. 24.

5000억 재일교포 파친코 갑부의 몰락

홍춘봉편집국 기자·기자

그는 한때 돈을 보내라고 지시하는 사람이었다.

 

홋카이도에 있는 자신의 회사로 연락하면 돈이 움직였다. 파친코 영업장에서 벌어들인 돈이었고, 젊은 날 남보다 기계 한 대라도 더 팔려고 이를 악물며 쌓은 재산이었다.

 

한국 카지노에서 돈이 떨어지면 일본에 연락했다. 다시 돈이 왔고, 그는 다시 테이블에 앉았다.

 

말년에 이르러 돈의 방향은 같았지만 처지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에게 생활비를 보내는 사람은 일본에 있는 친척이었다. 더는 회사에 송금을 지시할 수 없었다. 자신의 영업장도, 삿포로의 대저택도 남아 있지 않았다. 생활이 어렵다고 사정을 설명하고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렇게 도착한 돈 가운데 일부는 먹고사는 데 썼다. 나머지는 강원랜드로 가져갔다.

 

최근 수년 동안 만난 장재국씨(가명.90)의 이야기는 이 두 종류의 송금 사이에 놓여 있었다.

 

일본에서 태어나 재일한국인으로 살아온 그는 파친코 사업으로 막대한 재산을 일궜다고 했다. 그가 말한 전성기의 재산은 약 5000억원대였다. 그러나 최근 만난 노년의 그는 강원랜드 인근에서 친척의 지원으로 생활하는 처지였다.

 

그의 회고에는 자신감과 후회가 번갈아 나타났다. 사업 이야기를 할 때면 남에게 지기 싫어했던 젊은 시절이 살아났고, 카지노 이야기에 이르면 끝내 되찾지 못한 돈과 떠나간 사람들 앞에서 말이 무거워졌다.

 

그는 자신의 몰락을 설명할 수 있었다.

 

어디에서 첫 게임을 했는지, 얼마를 땄다가 잃었는지, 어느 순간 멈췄어야 했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설명할 수 있다는 것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장씨가 파친코 업계에 발을 들인 것은 1962년이었다.

 

도쿄에서 관련 사업을 하던 삼촌의 회사에 영업사원으로 들어갔다. 그가 맡은 곳은 홋카이도였다. 일본의 북쪽 끝, 도쿄와는 기후도 생활환경도 다른 지역이었다.

 

그에게 주어진 것은 자신의 가게가 아니라 남의 기계를 팔아야 하는 영업구역이었다.

 

“선배들이 나보다 파친코 기계를 한 대라도 많이 팔면 은근히 화가 치밀었어. 주간, 월간 목표를 세워놓고 어떻게든 채우려고 했지.”

 

그는 자신의 성격을 설명할 때 싸움 이야기를 꺼냈다. 상대의 덩치가 커도 물러서지 않았다고 했다. 이길 때까지 버티는 기질이 장사에서도 그대로 나왔다.

 

재일한국인으로 살아오며 겪었다는 차별과 설움도 그에게는 뒤처질 수 없다는 다짐으로 남아 있었다.

 

홋카이도에서 영업을 시작한 지 2년여 만에 회사에서 손꼽히는 실적을 올렸다. 남보다 더 팔았다는 결과는 다음 목표를 만들었다. 언제까지 삼촌 회사의 영업사원으로만 살 수는 없었다.

 

4년가량 일한 뒤 독립을 결심했다.

 

그동안 모은 돈으로 삿포로 시내에 땅을 사고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다. 파친코 기계 100대를 들여놓았다. 자신의 이름으로 책임져야 하는 첫 사업이었다.

 

기계를 파는 사람에서 손님을 맞는 업주로 자리가 바뀌었다.

 

그는 삿포로의 긴 겨울을 사업의 조건으로 읽었다. 눈이 많이 내리고 추위가 오래가는 도시에서 사람들이 실내 오락을 찾는다고 판단했다. 영업사원으로 지역을 돌아다니며 쌓은 인맥과 경험을 자신의 가게에 쏟아부었다.

 

첫 가게를 낸 뒤 1년 만에 점포를 하나 더 열었다고 했다.

 

사업이 커지던 무렵 삿포로에서는 1972년 동계올림픽이 열렸다. 도시가 성장하는 동안 그의 점포도 늘어났다. 그는 그 시절을 회고하며 자신이 성공할 곳을 제대로 골랐다고 여겼다.

 

그에게 돈은 우연히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목표를 세우고 경쟁자를 이기고, 번 돈을 다시 사업에 넣은 결과라고 믿었다. 그 믿음에는 실제로 자신이 일으킨 가게들이 근거로 서 있었다.

 

마침내 그는 삿포로 중심지의 5층 건물을 사들였다.

 

건물 전체를 파친코 영업장으로 바꾸고 기계 750대를 설치했다고 했다. 당시로서는 대담한 시도였으며 큰 화제를 모았다는 것이 그의 회고다. 일본 최초였다는 그의 설명을 하면서 그 건물이 장씨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자랑했다.

 

자신이 어디까지 올라왔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한때 기계 한 대를 더 팔려고 뛰던 청년이 이제는 1000대 가까운 기계에서 수익을 거두는 사장이 됐다.

 

스포츠카와 벤츠를 타고, 넓은 부지의 고급 주택에서 살았다. 골프도 배웠다. 승부를 좋아하는 성격은 골프에서도 나타났고 실력은 싱글 수준에 이르렀다고 했다.

 

돈을 벌었고, 잘하는 것도 많았다.

 

그 무렵의 장씨에게는 자신이 통제하지 못할 일이 많지 않아 보였을 것이다.

 

1980년, 그의 사업에 세무조사라는 위기가 닥쳤다.

 

장씨는 일본 세무당국 직원 수십 명이 영업장과 사무실, 자택을 조사했다고 회고했다. 사업으로 큰돈을 벌면서도 세금은 적게 냈다는 말도 스스로 했다. 추가로 세금을 납부한 뒤 조사가 마무리됐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 일을 겪은 뒤 골프 친구인 재일한국인 사업가에게 한국행을 권유받았다.

 

한국에서 열리는 골프대회에 함께 가자는 제안이었다. 그는 안양의 골프장에서 열린 대회에 참가했다. 정확한 대회 명칭은 기억나지 않지만, 장씨가 자신의 인생에서 분기점으로 지목한 것은 그 골프 여행이었다.

 

한국에 온 목적은 카지노가 아니었다.

 

골프를 치고, 오랜만에 한국에서 시간을 보낸 뒤 일본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동행한 친구가 워커힐호텔에 가자고 했다. 며칠 쉬면서 즐길 것도 있다는 권유였다.

 

그렇게 찾아간 호텔에서 그는 처음 카지노를 접했고 마침내 게임을 했다.

 

그가 회고한 첫 승부는 블랙잭이었다. 두 시간가량 게임을 해서 100만원을 땄다고 했다.

 

파친코 업주였던 그에게도 직접 카지노 테이블에 앉아 돈을 걸고 카드를 받는 경험은 새로웠다. 사업에서 벌어들이는 돈과는 다른 속도로 승패가 결정됐다. 첫 경험의 결과는 승리였다.

 

문제는 친구가 잃었다는 데서 시작됐다.

 

친구는 200만원을 잃고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장씨는 자신이 그 돈을 따주겠다고 나섰다.

 

남의 손실까지 해결할 수 있다는 호기였다. 자신은 이미 이겼고, 조금만 더 하면 친구가 잃은 돈도 되찾을 수 있다고 여겼다.

 

그날 밤 결과는 반대였다.

 

친구의 돈을 찾아주기는커녕 자신이 가져온 5000만원까지 잃었다고 했다.

 

처음 땄던 100만원은 사라졌다. 이제 테이블에 앉아 있는 이유도 달라졌다. 재미로 시작한 게임이 되찾아야 할 돈이 있는 승부로 바뀌었다.

 

그는 한국의 은행에 예치해 둔 돈 1억원을 찾아왔다.

 

그 돈도 사흘을 넘기지 못했다고 했다.

 

멈추는 대신 일본의 회사로 연락했다. 송금액이 커졌다. 1억원, 3억원, 5억원, 10억원. 장씨가 기억하는 첫 한국 카지노 체류의 손실은 50억원이었다.

 

당시 송금과 게임 기록을 확인한 것은 아니다. 금액은 장씨가 취재 과정에서 거듭 설명한 자신의 기억이다.

 

그 기억 속에서 가장 뚜렷한 것은 돈이 사라지는 속도였다.

 

삿포로에서는 가게를 열고, 손님을 모으고, 기계를 늘려 돈을 벌었다. 한국의 카지노에서는 그 돈이 며칠 사이에 없어졌다.

 

그제야 그는 게임을 멈췄다.

 

이대로라면 전 재산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일본으로 돌아간 뒤에도 끝난 승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에 남은 액수는 50억원이었다.

 

장씨는 패인을 분석했다.

 

밤새 게임을 한 것이 문제였다고 생각했다. 화가 난 상태에서 무리하게 베팅한 것도 잘못이었다. 본전을 찾겠다는 마음 때문에 판단이 흐려졌다고 스스로 진단했다.

 

여기까지는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었다.

 

그런데 결론은 다시 카지노에 가겠다는 것이었다.

 

게임 시간을 줄이고, 무리한 베팅을 삼가고, 적절한 순간에 치고 빠지면 돈을 찾아올 수 있다고 믿었다. 사업에서 실패의 원인을 고쳐 재도전하듯 카지노에서도 해답을 찾으려 했다.

 

영업사원 시절의 장점이 그를 다시 움직였다.

 

남에게 지면 더 노력했고, 방법이 틀리면 바꿨으며, 끝내 목표를 채웠다. 이번에도 그렇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귀국한 지 한 달가량 뒤 그는 다시 한국으로 향했다.

 

장씨는 당시 일본의 카지노 운영사 지사에 게임 자금을 예치한 뒤 입국했다고 회고했다. 호텔에서는 스위트룸을 제공받았다고 했다.

 

이번에는 바카라였다.

 

그가 들려준 기억 속의 베팅액은 빠르게 커졌다. 1000만원을 걸어 이기고, 2000만원을 걸어 다시 이겼다. 4000만원, 8000만원. 연이어 승리했다고 했다.

 

그는 며칠 만에 앞서 잃은 50억원을 되찾았다고 설명했다.

 

그 경험은 첫 패배보다 더 위험한 확신을 남겼다.

 

처음에는 몰라서 당했지만, 제대로 하면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카지노에서 크게 잃은 뒤 다시 크게 이긴 기억은 오랫동안 그를 붙잡았다. 이후 돈을 잃을 때마다 그때처럼 한 번만 흐름을 잡으면 된다는 생각을 버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장씨는 그 방문에서 자신이 목표한 돈을 채우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욕심내면 다시 잃을 것을 알았다는 설명이었다.

 

적어도 그 순간의 그는 자신이 승부뿐 아니라 욕심까지 통제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다음 일에 대한 기억은 전혀 달랐다.

 

장씨는 자신이 딴 거액을 현장에서 전부 받지 못하고 보관증을 받아 일본 지사로 갔으며, 그곳에서도 일부만 지급받았다는 설명이다. 그는 훗날 이를 자신의 재방문을 유도하려는 조치였다고 해석했다.

 

돈을 받으러 간다는 이유와 돈을 더 따겠다는 마음이 어떻게 뒤섞였는지, 수십 년이 흐른 뒤 그는 이 일 때문에 빈털터리 신세가 되었음을 절감했다.

 

분명한 것은 삿포로로 돌아가 사업에 전념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그가 다시 한국행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한 번의 큰 승리가 오래된 패배를 지우는 대신 새로운 승부의 근거가 됐다.

 

그 뒤로 일본과 한국을 오가는 일이 잦아졌다.

 

당시에는 삿포로에서 김포공항으로 곧바로 오는 항공편이 없어 도쿄를 거쳐야 했다고 했다. 먼 길이었지만 그는 카지노를 찾았다. 공항에 도착하면 호텔 측 차량을 타고 이동했다는 기억도 들려줬다.

 

삿포로의 사업장에서는 계속 돈이 들어왔다.

 

그 사실이 그를 버티게 했고, 동시에 더 오래 게임하게 했다.

 

큰돈을 잃어도 다음에 가져올 돈이 있었다. 아직 가게가 있었고 건물이 있었다. 사업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손실을 메울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카지노에서의 패배는 가정으로도 번졌다.

 

1985년, 첫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장씨는 부인이 스스로 생을 마쳤다고 전했다.

 

그가 남긴 회고에는 세 자녀를 둔 가정과 아내를 잃은 상실이 함께 있었다.

 

한동안 카지노 출입을 끊었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런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그 무렵 이미 카지노에서 500억원 이상을 잃었다고 설명했다. 막대한 손실과 배우자의 죽음은 멈춰야 할 이유였지만, 장씨는 다시 카지노로 향했다.

 

마음이 울적해서 더 자주 갔다는 것이 그의 말이었다.

 

돈을 잃게 한 장소가 슬픔을 피하려고 찾아가는 장소가 됐다.

 

그곳에서 한 여성을 만났다.

 

호텔 판촉 업무를 하던 직원으로, 일본어와 영어에 능숙하고 친절했다고 기억했다. 업무로 시작된 만남에 장씨의 마음이 기울었다.

 

한국에 올 때마다 선물을 준비했다. 도쿄의 백화점과 공항에서 화장품과 스카프, 가방을 샀다고 했다. 나이 차이는 열세 살이었다.

 

그는 그 시절을 이야기할 때 젊은 사람처럼 사랑했다고 표현했다.

 

사업가로 대접받고,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고, 다시 가정을 꾸릴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1986년 봄 마침내 사랑하는 워커힐 여직원과 재혼했다.

 

새 부인과 삿포로의 집에서 생활하던 초기에는 행복했다고 했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던 삶이 다시 집 안으로 모이는 듯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사업의 중심이 흔들리고 있었다.

 

장씨는 카지노 손실과 빚 때문에 가장 수익이 좋았던 5층 파친코 건물을 처분했기 때문이다.

 

기계 한 대를 더 팔려고 뛰던 시절부터 쌓아 올린 성공의 상징이었다. 그 건물을 손에서 놓아야 했다.

 

그래도 작은 영업장 네 곳이 남아 있었다고 했다. 대저택도 있었다. 남은 사업에서 수익이 들어왔다.

 

그에게는 여전히 살아갈 기반이 있었다.

 

하지만 신혼의 평온은 카지노로 향하는 발길을 오래 붙잡지 못했다.

 

그는 다시 한국을 드나들었다.

 

장씨는 그 뒤에도 수백억원을 잃었다고 회고했다. 재혼한 부인은 몇 년 후 이혼을 통보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두 번째 가정도 끝났다.

 

카지노에서 돈을 되찾겠다는 생각을 이어가는 동안, 집에서는 되돌리기 어려운 이별이 진행되고 있었다.

 

장씨가 말한 재산의 감소는 큰 숫자로 이어졌다.

 

수천억원대였다는 재산, 누적 1000억원에 이르렀다는 손실, 일본을 떠날 무렵에는 100억원에도 미치지 못했다는 잔여 재산.

 

독립적으로 확인하지 못한 금액들이지만, 그의 회고가 향하는 방향은 한결같았다.

 

팔았고, 줄었고, 다시 잃었다.

 

삿포로의 사업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옮긴 뒤에도 카지노 출입은 계속됐다. 남아 있던 돈도 결국 탕진했다고 전했다.

 

맨손으로 사업을 시작한 사람이라는 자부심은 마지막 재산을 지켜주지 못했다.

 

그는 돈을 버는 법을 알았다. 은행에서 자금을 빌려 가게를 키우는 법도, 경쟁자보다 더 많이 파는 법도 알았다. 손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읽으며 사업을 확장했다.

 

그런 자신이 카지노에서는 멈추지 못했다.

 

벌어본 돈이 많다는 기억은 오히려 손실을 작게 느끼게 했을 수 있다. 한때 하루에도 큰돈이 들어왔던 사람에게 생활비를 남겨두라는 말은 쉽게 몸에 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통장에 들어오는 돈과 쓸 수 있는 돈은 이미 달라져 있었다.

 

회사에서 벌어들이는 돈이 끊긴 뒤에도 게임을 대하는 습관은 남아 있었다.

 

2000년 10월 강원랜드가 문을 열자 그는 강원도 정선으로 향했다.

 

고한에 월 30만원의 단칸방 숙소를 얻고 바카라를 했다. 일본의 사업가였던 그가 폐광지역의 장기 체류자가 됐다.

 

그가 가진 인생의 지명도 달라졌다.

 

도쿄와 삿포로, 골프장과 고급 호텔을 오가던 시절 뒤에 고한과 카지노가 남았다.

 

과거에는 여행을 마치면 돌아갈 저택이 있었다. 영업장에는 자신을 기다리는 일이 있었다.

 

노년에는 카지노 밖에서 무엇을 하며 지낼 것인지부터 막막해졌다.

 

“카지노 말고는 달리 할 것도, 갈 곳도 없어.”

 

그 말은 그가 처한 빈곤을 돈보다 넓게 보여줬다.

 

재산만 줄어든 것이 아니었다. 일하던 장소와 가족이 있는 집, 시간을 보낼 이유가 차례로 사라진 뒤에도 카지노는 남아 있었다.

 

일본의 친척이 매달 생활비를 보내줬다고 했다.

 

장씨가 설명한 금액은 한 달 800만원이었다. 일반적인 노후 생활비로는 적지 않은 돈이지만, 그는 일부만 생활에 쓰고 나머지는 게임에 썼다고 말했다.

 

돈이 들어오면 생활을 안정시킬 기회도 함께 왔다.

 

그러나 그 돈은 다시 베팅 자금이 됐다.

 

젊은 시절의 장씨는 목표를 채우기 위해 자신을 다그쳤다. 노년의 장씨는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도 같은 장소를 찾았다.

 

자신의 사업은 사라졌고, 가족과는 멀어졌으며, 친척이 보내주는 돈으로 카지노를 찾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삶을 화려했던 젊은 날과 비참해진 노년으로 나눴다.

 

“젊어서는 화려하게 살았지만 노년에 이렇게 비참하게 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

 

그에게도 처음부터 그런 미래가 예정돼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골프 여행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첫 손실 뒤 멈출 수도 있었다. 큰돈을 되찾았다고 믿었던 순간에 카지노와 인연을 끊을 수도 있었다.

 

5층 건물을 처분하고 남은 가게들을 지킬 수도 있었다.

 

새 가정을 꾸린 뒤 집에 머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장씨가 들려준 선택의 끝에는 번번이 다음 게임이 있었다.

 

그는 돈을 찾으려 했다고 말했다.

 

그사이 돈으로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이 먼저 떠났다.

 

2026년 초부터 장씨와 연락이 닿지 않았다.

 

주변에서는 객지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난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생전에 “카지노에 수천억을 탕진했어. 그렇게 많았던 재산이 눈 녹듯 사라지는데 카지노가 그렇게 무서운 줄은 전혀 몰랐지. 생각해보면 지독한 도박중독자였다. 지금도 돈이 생기면 베팅을 해야 마음이 차분해져. 이제는 기운도 없고 이렇게 살다 끝나는 거지 뭐”라고 말했다.

 

 

자주 묻는 질문

재일교포 파친코 갑부였던 장씨는 어떻게 몰락하게 되었나요?+

장씨는 삿포로에서 파친코 사업으로 5,000억 원대의 막대한 자산을 일궜으나, 한국 카지노를 방문한 뒤 도박에 빠지면서 몰락했습니다. 처음에는 재미로 시작한 게임이 큰 손실을 메우려는 집착으로 변했고, 본전을 찾겠다는 심리로 인해 사업체와 건물, 자택까지 모두 처분하며 결국 친척의 지원을 받아야 하는 빈털터리 신세가 되었습니다.

사업가로서 성공했던 장씨가 카지노에서 멈추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장씨는 젊은 시절 파친코 영업사원으로서 목표를 세우고 경쟁에서 이기며 성공을 쟁취했던 경험을 카지노에도 그대로 대입했습니다. 그는 패배의 원인을 스스로 분석하고 전략을 수정하면 다시 돈을 딸 수 있다는 잘못된 확신을 가졌습니다. 특히 한때 잃었던 돈을 크게 되찾았던 경험이 그를 도박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치명적인 독이 되었습니다.

카지노 도박이 장씨의 개인적인 삶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도박은 재산뿐만 아니라 장씨의 가정까지 파괴했습니다. 첫 번째 부인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에도 도박을 멈추지 못했고, 재혼한 두 번째 부인과의 생활도 도박으로 인한 갈등과 경제적 파탄으로 인해 결국 이혼으로 끝났습니다. 그는 도박을 통해 슬픔을 잊으려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소중한 사람들을 모두 떠나보내고 노년에 이르러 고립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기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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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춘봉기자

카지노 이슈와 산업 전반을 취재하는 타타타 저널의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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