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한역의 신문지 한 장
2001년 어느 날 밤, 강원도 정선군 고한역.
한 남자가 역사 한쪽에서 신문지를 덮고 잠을 청했다.
주머니에는 동전 한 닢 없었다. 끼니를 거른 지도 사흘째였다. 배는 고팠지만 누구에게도 손을 벌리지 않았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세계의 바다를 누비며 한 달에 수천만원을 벌었던 남자였다.
남미와 호주, 유럽, 아프리카는 물론 동남아시아의 수많은 항구에서 술과 여자, 카지노를 즐겼던 마도로스. 수십만t급 유조선에서 선원들을 호령하던 갑판장.
그러나 그날 밤 그에게 남은 것은 신문지 한 장 뿐이었다.
강만진(가명·69)씨.
부산 출신인 그는 자신이 어쩌다 이 지경까지 추락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강원랜드 카지노 때문이었다.
"그때는 진짜 돈 한 푼 없었어요. 사흘을 굶기도 했지. 그래도 남한테 돈 달라는 소리는 못 하겠더라고."
고한역에서 신문지를 덮고 잠을 잤다는 이야기를 꺼내면서도 그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카지노 주변에는 남에게 돈을 빌리거나 구걸하며 연명하는 이른바 '앵벌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생활만큼은 할 수 없었다고 했다.
"내가 아무리 못살아도 남에게 피해 주는 짓은 못 해요. 그건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그 자존심이 사흘간의 굶주림보다 강했던 것일까.
그는 그날의 추위를 기억했지만, 정작 카지노에서 얼마를 잃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돈을 잃은 날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갑판장
그가 처음 배를 탄 것은 열아홉 살 무렵인 1970년대 중반이었다.
당시 한국에서 원양선원은 돈을 벌 수 있는 특별한 직업이었다. 해외에서 외화를 벌어오는 뱃사람들은 웬만한 육지 직장인보다 높은 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강씨는 화물선 가운데서도 위험성과 전문성이 높은 유조선과 케미컬선을 주로 탔다.
수천t급 선박에서 시작해 수십만t급 유조선까지 경험했다.
경력이 쌓이면서 갑판장 자리에 올랐다.
갑판장은 단순히 선원들을 지휘하는 반장이 아니었다.
유조선에서 화물을 싣고 내리는 작업은 작은 실수 하나가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다.
어느 탱크에 원유를 싣고, 어느 배관으로 항공유나 다른 석유제품을 옮길지 정확하게 관리해야 했다.
"기름이라는 게 종류가 얼마나 많은 줄 알아요? 탱크 하나 잘못 연결하면 난리가 나는 거예요. 갑판장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해."
그는 원유를 정제하고 가공하면 연료는 물론 플라스틱과 합성섬유의 원료까지 다양한 제품이 만들어진다고 설명했다.
이야기가 배로 돌아가자 목소리부터 달라졌다.
한때 수십명의 선원을 상대하며 거친 작업을 지휘하던 갑판장의 기질이 살아나는 듯했다.
"배에서는 어영부영하면 안 돼요. 말귀 못 알아듣고 일을 제대로 못 하면 다른 사람 목숨까지 위험해진다고."
그의 말에 따르면 당시 뱃사람들의 세계는 군대 못지않게 위계질서가 엄격했다.
선후배 관계도 분명했다.
하지만 거친 규율 속에서도 서로를 돕는 동료애가 있었다.
태평양과 인도양을 건너는 항해는 짧아도 수개월 넘게 걸렸다.
부산항을 떠나 남미에서 기름을 싣고 아시아 항구를 돌아 귀국하는 데 최소 두 달 반 이상 걸리기도 했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 멀미와 피로, 사고 위험.
그 모든 고생을 견디게 만든 것은 돈이었다.
그런데 정작 그 돈이 그의 인생을 무너뜨리는 씨앗이 될 줄은 몰랐다.






